목회칼럼 02/02/2025
- Man Sub Kim
- Feb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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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 금요일 예배에 나눈 말씀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이다. “애통은 생명의 시작이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사무엘하 1장에 나오는 이 다윗의 애통은 요나단을 위한 애통이라면 정말 이해가 간다. 그러나 만약 사울의 죽음을 애통해 한다면, 다윗의 입장에서 이해가 안가다. 왜인가? 다윗은 평생에 사울에게 쫓겨 살았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3000명의 특수군을 준비했다. 다윗은 어쩔수 없이 다신이 죽인 골리앗의 고향인 가사로 도망가 살아야 했다. 다윗이 사울을 대적자, 원수로 여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사울이 죽었을때, 다윗은 대적자가 죽은 것을 기뻐하거나, 의기양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애통해 했다.
그럼 다윗은 왜 자신의 대적자인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 애통해 했는가?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켜야 할 왕이었다. 그리고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괭장한 장수였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적군들을 쳐, 이스라엘에 큰 승리를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이런 자들이 죽은 것이다. 다윗의 애통을 보자. 사무엘하 1:23절, “23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다윗의 애통은 자신의 감정과 안위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용사들이 죽은 것에 대한 애통이었다.
이 애통은 다윗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애통이었다. 기름 부음 받은자, 사울이 좀더 아름답게, 거룩하게, 진실하게 삶을 살지 못하고, 오직 복수와 질투와 미움에 사로잡혀 살아간 결과 죽음과 죄에 잡혀 살다가, 안타깝게도 전장에서 그의 아들 요나단과 함께 블레셋이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손에 같이 죽은 것에 대한 애통함이다. 다윗은 성령의 사람이었다. 그의 애통함은 성령의 감동이었다.
요즘 시대는 애통이 사라졌다. 우리가 애통할때는 정말 우리 가운데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죽을 일이 생기면 애통해 한다.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애통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애통은 천국의 시민들이 가져야 하는 가장 귀중한 감정이고, 간구의 핵을 이룬다. 왜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바라보며 애통해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땅에 계실때, 애통하셨다. 성령께서는 지금 우리 가운데서, 애통으로 울부짖으신다. 애통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애통하게 된다. 죄악으로 무너진 삶, 절망 속에서 헤매는 삶, 관계의 파괴로 고통을 겪는 삶, 우리 주변에는 애통해야 할 요소들이 수도 없이 많다.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를 약속하셨다. 마태복음 5:4을 보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천국을 이루어 가는 길에 애통이 있다. 애통은 지옥의 분노와 질투를 사라지게 한다. 다윗의 애통은 전염병과 같이 온 이스라엘이 같이 애통해 한다. 그들의 애통을 통해 전 이스라엘이 위로를 받는다. 위로를 받은 백성들은 힘을 얻게 된다.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된다. 애통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지면이 짧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애통이 우리를 살렸다. 우리도 이 세상의 무너진 삶을 보며 애통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은 증거이다. 애통해하자, 아프고, 무너지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영혼들을 위해서…